MBTI가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없는 이유

5장. 직업적성검사는 답이 아니라 시작이다
"선생님,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요. 제가 뭐하면 되는 거예요?"
정우진 씨(24세)는 직업적성검사 결과지를 들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그는 검사를 받으면 자신에게 맞는 직업이 명확하게 나올 거라고 기대했다. 마치 혈액형 검사나 건강검진처럼, 결과지에 답이 적혀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기대는 자연스럽다. 우리는 불확실함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특히 진로처럼 중요한 문제일수록 누군가 명확한 답을 제시해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심리검사나 적성검사를 '답을 알려주는 도구'로 생각한다.
하지만 직업상담사로서 수백 명의 검사 결과를 해석해 주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검사는 답이 아니다. 검사는 질문을 시작하는 도구일 뿐이다.
검사가 말해주는 것, 말해주지 못하는 것
홀랜드 직업적성검사를 받은 김미영 씨(29세)의 결과는 'S형(사회형)'과 'A형(예술형)'이 높게 나왔다. 결과지에는 '적합한 직업으로 교사, 상담사, 사회복지사, 디자이너' 등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럼 저는 이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되는 거죠?"
김미영 씨가 물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이 검사는 당신의 성격적 특성을 보여줄 뿐이에요. 실제로 그 일을 잘 할 수 있는지, 좋아할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죠."
검사 결과는 통계적 경향성을 보여준다. 'S형 성격을 가진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사람과 관련된 직업에서 만족감을 느낀다'는 정도의 정보다. 하지만 당신이 그 통계 안에 들어갈지, 예외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리학자 월터 미셸(Walter Mischel)은 '인간-상황 논쟁'에서 성격 특성만으로는 행동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같은 성격이라도 상황에 따라, 경험에 따라, 가치관에 따라 전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검사 결과와 다른 나를 발견할 때
흥미로운 건 검사 결과가 자신의 생각과 다를 때다. MBTI에서 I(내향형)가 나왔는데 "저는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는데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직업가치관 검사에서 '안정성'이 가장 높게 나왔는데 "저는 도전적인 일을 하고 싶은데..."라고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도 있다.
이럴 때 나는 이렇게 말한다. "검사 결과가 틀렸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자신이 생각하는 나와 실제 내가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박재현 씨(31세)는 직업가치관 검사에서 '자율성'과 '창의성'이 높게 나왔다. 하지만 그는 10년 가까이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공무원을 꿈꿔왔다. "이 결과가 맞는 걸까요? 저는 안정적인 게 좋은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가 공무원을 꿈꾸는 이유는 부모님의 기대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대학 시절 밴드 활동을 하며 가장 행복했고, 자유롭게 기획하고 창작하는 일에 몰입했던 경험이 있었다. 검사는 그의 내면에 있던, 하지만 본인조차 외면하고 있던 욕구를 드러내 준 것이다.
검사는 대화의 시작점
나는 검사 결과를 해석해 줄 때 숫자나 유형보다는 질문을 던진다.
"여기 보면 현실형(R) 점수가 낮게 나왔어요. 기계나 도구를 다루는 일에 흥미가 적다는 뜻인데, 실제로 그런가요?"
"맞아요. 저는 손으로 뭔가 만드는 거 진짜 못해요."
"그럼 반대로 사회형(S) 점수가 높게 나왔는데,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걸 좋아하시나요?"
"음... 좋아하긴 하는데, 사실 너무 많은 사람을 상대하면 지쳐요."
이런 대화를 통해 검사 결과는 단순한 숫자에서 그 사람만의 이야기로 변환된다. 검사는 '당신은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규정하는 게 아니라, '이런 부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볼까요?'라고 제안하는 도구인 것이다.
검사 결과를 맹신하는 위험
더 위험한 건 검사 결과를 맹신하는 경우다. "검사에서 이렇게 나왔으니 저는 이 일은 못하는 거죠?"라며 스스로를 제한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내담자는 MBTI에서 T(사고형)가 나왔다는 이유로 "저는 감정 표현을 못하니까 상담사는 안 되겠네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MBTI는 선호 경향을 보여줄 뿐, 능력의 유무를 판단하는 게 아니다. T형이라도 훈련과 노력을 통해 얼마든지 공감 능력을 기를 수 있다.
심리검사의 창시자들조차 이를 경고했다. 스탠포드-비네 지능검사를 개발한 알프레드 비네(Alfred Binet)는 "검사는 아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지, 낙인찍기 위한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검사 후가 더 중요하다
정말 중요한 건 검사를 받은 '후'다.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자신에 대해 질문하고, 탐색하고, 실험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검사에서 예술형이 높게 나왔다고요? 그럼 실제로 예술 관련 활동을 해보셨나요?"
"아니요, 해본 적 없어요."
"그럼 한번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림 그리기 클래스에 등록하거나, 사진 동아리에 가입하거나, 작은 프로젝트라도 시작해 보세요. 그래야 이게 정말 당신에게 맞는지 알 수 있어요."
검사는 가능성을 보여줄 뿐이다.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건 오롯이 당신의 몫이다.
검사를 제대로 활용하는 법
- 결과를 참고하되 맹신하지 마라. 검사는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 자기 이해의 도구로 활용하라.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라는 발견의 계기로 삼아라.
- 질문을 만들어라. 결과를 보고 '왜 이렇게 나왔을까?', '실제로 나는 어떤가?'를 생각해 보라.
- 실험하고 경험하라. 검사 결과가 제안하는 방향으로 작은 실험들을 해보라.
- 상담사와 함께 해석하라. 혼자 결과지를 보고 판단하지 말고, 전문가와 함께 의미를 찾아라.
정우진 씨는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3개월간 다양한 체험 활동을 했다. 그리고 검사에서 높게 나온 분야가 실제로는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 검사는 답을 주지 않았지만, 답을 찾는 여정의 시작점이 되어준 것이다.
검사는 나침반이다. 방향을 알려주지만, 그 길을 걸어가는 건 당신이다.